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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 입은 시민’인 제가 제안한 정책들이 시정에 반영되는 순간만큼 짜릿한 경험은 없는 것 같아요.”
경기 하남시 청소년의회 의장인 김진주(15·하남중 3년)양은 지난 2년간의 의정활동이 “짜릿했다”고 말했다. 김양은 “지난해 코로나19로 대부분의 일정이 연기돼 무척 아쉬웠다”면서도 “올해는 상임위원회별로 마련한 정책들이 시에 전달되고 반영돼 보람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김양이 몸담은 하남시 청소년의회는 독특한 의사결정 구조를 지닌다. 교육·국제외교·문화체육·안전환경·인권소통의 5개 상임위에 속한 30여명의 중고생 의원들은 7명의 대학생 청년 보좌관의 도움을 얻어 의정활동을 이어간다. 자료를 조사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설문을 올리면서 정책의 틀을 잡아간다. 때로는 정책 제안에 그치지 않고 기후위기 시민운동에 참여하거나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강소도시’ 비결은?…청소년 의회·참여예산제 등 청소년 자치
인구 31만명의 ‘강소도시’ 하남시가 청소년 자치시대를 활짝 열어가고 있다. 인구 6명 중 1명이 청소년(만 9∼24세)인 하남에선 어느새 청소년들이 정책을 입안하고 예산·사업 집행권을 행사하는 시정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청소년수련관 관장과 운영위원을 청소년 가운데 선출하며 새로운 패러다임도 제시했다.
22일 하남시에 따르면 지금까지 시에 뿌리내린 청소년 관련 정책들은 ‘청소년의회’ ‘청소년운영위원회’ ‘청소년관장제’ ‘청소년참여예산제’ ‘청소년정책제안대회’ 등이 있다. 민선 7기 김상호 시장 취임 이후 첫발을 뗀 것들이다.
이 정책들은 독일 작가 헨리 빈터펠트의 소설 ‘아이들만의 도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자신의 경험과 판단으로 성숙한 인격체로 바뀌는 아이들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또래 중고생 선거인단의 투표로 선출되는 청소년의회는 하남형 청소년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불린다. 2019년 출범 이후 올해 제2대 의회를 꾸렸다. 격주로 대면·비대면 회의를 열어 쏟아내는 아이디어들은 심의·의결을 거쳐 정제된 정책으로 탈바꿈한다. 청소년 조례 제·개정과 참여예산에 적잖은 영향도 끼치고 있다. 지금까지 실현된 제안 가운데는 다문화 청소년을 위한 밀키트(식재료·양념·조리법이 담긴 쿠킹 박스) 제작, 청소년 창업교육·지원 프로그램 등이 있다.
지난달 열린 하남 청소년정책제안대회 ‘청·포·도(청소년의 포근하고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에선 청소년의회 인권소통상임위가 내놓은 청소년 노동인권 보호 및 증진 조례 개정, 노동인권센터 설립안이 금상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경쟁을 벌인 청소년 행복주간 지정, 수도권 제1 순환고속도로를 활용한 청소년 이동 편의성 확대 등도 높은 점수를 얻었다. 김 시장은 “임기 첫해부터 청소년정책대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그때마다 색다른 시선과 지적에 놀라고 있다”고 전했다.
하남시 청소년의회는 오는 11월 입후보와 서류 심사를 거쳐 제3대 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인단 투표에 들어간다. 김시영 부의장(17·미사강변고 2년)은 “의회 활동이 공부에 방해가 되진 않는다”면서 “자신의 진로가 무엇이든 간에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건설적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처음 편성한 청소년 주민참여예산은 이 같은 청소년의회 활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사업공모와 청소년 리빙랩 프로젝트를 통해 각 1500만원의 청소년 제안사업이 올해부터 본예산에 반영됐다.
◆10대 청소년수련관장에 예산 집행권… 학교 밖 청소년의 연대도 강조
시는 하남형 청소년참여예산제 틀을 잡기 위해 9명의 청소년이 참여하는 청소년사업심의위원회도 꾸렸다. 이곳에선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시 관계자는 “능동적인 시정 참여를 유도해 민주시민으로서 능력을 함양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남 청소년 자치의 중심은 청소년수련관이다. 청소년수련관은 ‘청소년의,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을 위한’을 표어로 내걸었다. 개관 전부터 9명의 준비기획단을 운영하면서 수련관 건립에 청소년 의견을 반영하는 등 출발부터 남달랐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처음 도입한 청소년관장제는 이렇게 빛을 발했다. 시는 관장을 비롯해 운영위원의 30% 이상을 청소년으로 뽑도록 했다. 청소년을 기관 운영에 직접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참여권을 확대한 셈이다.
10대인 김어진 청소년관장은 예산 집행권을 갖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공약·정책 사업을 실행 중이다. 청소년운영위원회도 매달 두 차례 열려 시설과 프로그램 등의 모니터링 작업을 한다.
청소년수련관은 자치기구 운영과 동아리 활동에도 도움을 준다. 매달 직접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청소년기획단을 운영하고 있다. ‘하남시청소년수련관 이벤트(HI)’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꾸리는데, 신학기를 맞은 청소년에게 선물상자를 주는 ‘우리의 새 학기를 응원해’(3월)와 페트병 재활용으로 화분을 만드는 ‘내 손에 텃밭’(4월) 등이 주목받았다. 올 11월에는 자치기구와 동아리연합회 등이 머리를 맞대고 방향성을 재정립할 예정이다.
하남형 청소년민주주의 혜택은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도 향한다. 이들이 운영하는 자치위원회 ‘너나들이’가 중심이다.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은 개인의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서비스를 마련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온라인 비대면 프로그램을 활성화해 학교 밖 청소년들이 연대의식을 갖도록 했다.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 발굴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난 5월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청소년이 묻고 시가 답하다’란 토크 콘서트는 청소년과 시 사이에 소통의 단면을 드러냈다. 방역수칙 준수를 위해 40여명의 청소년은 현장에서, 나머지 40여명은 온라인 ‘줌’을 통해 참여했는데, 예상 밖 질문이 쏟아지면서 분위기를 달궜다.
이 자리에서 청소년들은 전동킥보드 방치 대책, 코로나19 백신 불안 해소책 등 현안과 관련된 질문을 이어갔다. 이후 분위기가 무르익자 ‘시장의 급여는 얼마인지’ ‘시장이 되고 힘든 점은 무엇인지’ 등 가감 없는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행사에 참여한 배은진(18·미사고 3년) 양은 “거리를 좁히고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시 관계자는 “하남시는 최근 5년간 인구의 50% 가까이가 늘 만큼 급격한 성장세를 보여줬다”며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적과 문화, 환경 외에 청소년은 시의 지속가능성을 책임지는 한 축”이라고 설명했다.
하남=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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